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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_평

[아버지의 깃발] 읽다

flogsta 2009. 10. 18. 21:02

워낙 유명한 사진이라, 위의 사진을 언젠가 어디선가 한번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오지마(유황도)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산을 점령한 미군이 산꼭대기에 성조기를 꽂는 장면이다.

이 책은 위 사진에 찍힌 여섯명의 군인 중 한 사람인 존 브래들리의 아들이 쓴 글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오지마 전투에 위생병으로 참가했고, 위의 사진에 찍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극도로 꺼려한다. 마침내 존 브래들리가 죽자 그의 아들 제임스는 아버지의 행적을 뒤좇아 수많은 기록을 뒤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듣고서 이오지마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재구성해낸다.

책 표지에 등장하는 성조기를 꽂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악, 미국=선의 공식이 아니라,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와 권력속에서 서로 얽히고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와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사고를 사실적으로 드러내준다.

본문을 인용하여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해병들이 상륙하기 전에 최소 열흘동안 해군 전함들이 준비 포격을 해야한다고 ... 요청했다....열흘간의 준비포격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해군은 오직 사흘간의 준비포격을 약속했다.... 해군은 이미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육군 항공단에 신문 1면 머릿기사를 빼앗기기 싫은 나머지 뭔가 보여줘야겠다고 결심하고, 모양새는 더없이 좋지만 전략적 효과는 극히 의심스러운 일본 본토 포격에 군함을 보냈다.... 최후의 순간 해군은 또하나의 모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이오섬을 공격하기 위해 사전에 합의된 수보다 훨씬 적은 배를 보냈다. 나머지 배들은 일본 본토를 포격하느라 올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준비포격의 효력은 더욱더 줄어들었다.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해군의 포격은 2월 16,17,18일 사흘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포격이 가해진 날은 17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중공군식의 인해전술(!)로 해안에 무차별 돌진하게 되어 결국 수천명의 사망자를 내게 된다.
해군과 육군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사람의 생명보다 중시되는 규정, 자신의 실수를 덮어버리기 위해 진실마저 숨겨버리는 일들을 읽는동안 가슴이 답답한 것은 이런 일들이 어딘가 낯이 익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는 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어린 시절, 성격, 행동등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한 가족의 소중한 일원이며 직장의 동료와 학교의 친구인 한 인간이 많은 훈련 끝에 참가한 전투에서 총알 한방에 어이없이 나동그라지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Wilfred Owen의 Dulce Et Decorum 가 연상되는 중반부에서는 전투의 실제 그대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앞부분을 보는 것같다.해안에 내리자 마자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병사들, 엄폐물도 없이 어디서 총탄이 날아오는지도 모르는채 포복으로 전진하다 죽어가고, 죽은 시신은 바다에 둥둥 떠 다니고.....

후반부에서는 자본과 권력과 언론이,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고 왜 억지로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이렇게 "영웅"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집중조명을 받는 상황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 "영웅"을 보여주는 "그들"의 목적은 따로 있는 것. 깃발을 세운 세 "영웅"들중 두명은 불행하게 살다 간다.

짐작하겠지만, 나머지 한 "영웅"은 이 책의 저자의 아버지인 존 브래들리이며,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화려한 조명에 유혹당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서 은거하는 삶을 산 겸손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느 아들인들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그리고 싶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