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nd(life)
20년전의 오해를 바로잡기위해 본문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밝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지나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겨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마당, 1981>
위 시인은 "황색예수전"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은 아마 알 것이다. 우연히 내 이름과 같았기에 대학에 들어올때부터 선배들로부터 이 시인의 시를 읽어보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서점에서 "황색예수전"을 읽어보았는데,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내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이었다.
아무튼, 나와 같은 이름의 시인이 (그것도 유명한!)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후, 이 시인의 "지울수 없는 노래","기차에 대하여"등의 시집을 사서 읽어보곤 하였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시를 몇 편 써보긴 했지만, 단지 유명한 시인과 이름이 같다는 것 뿐, 시에 재능이 없다는건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우리과에서는 같은 과 선후배의 글을 모아 매년 문집을 발간하고 있었다. 내가 3학년인가 4학년일때, 그 해 문집의 발간을 책임지게 되었고, 속표지에 시를 한 편 써넣자는 의견이 나왔다. 시는 직접 써도 좋지만 다른 시인의 것을 실어도 좋다는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위의 시를 속표지에 썼다. 시인중에 나와 동명이인이 있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을테고, 시인 이름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일종의 우스개라고 생각하리라 여겼다.
문집이 발간되었고, 역시 시를 아는 몇몇 선배들은 시의 저자가 1954년에 출생하여 "황색예수전"을 발간한 시인이며, 아직 스물 다섯도 안된 대학생이었던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내가 정말로 위의 시를 쓴 것으로 오해한 몇 선후배들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실을 알게 되거나, 기억에서 멀어질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굳이 오해를 바로 잡아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다만 영문학 담당이시던 교수님 한 분이 내 이름을 물어보시더니,
"자네가 문집에 시를 쓴 그 학생인가? 잘 썼더구만. 약간은 상투적인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하고 칭찬하실때는 약간 찔리긴 했다. 하지만 더이상 언급이 없으셨기에 이 분도 곧 잊으실거라 생각하고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올해에, 그것도 며칠 전에, 한 후배에게서 오년 만에 전화를 받았다. 그 후배는 그 당시 문집을 만들때 함께 일했던 후배이고, 지금은 학원에 나가서 일을 한다. 그 후배는 낮부터 술을 마시고 취한 김에 생각나서 전화했다면서, 그때 문집에 써 준 시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맙소사!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역사가 진실을 밝힌다는 말이 맞지 않을수도 있다더니, 이 후배가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후배는 저 시를 쓴 사람이 바로 나라고 평생 알고 있었을것이 아닌가!
거짓임을 밝히는 것은 바로 그자리가 아니면 갈수록 힘든 법이다. 뒤늦게나마 진실을 바로 잡고자 이 글을 쓴다.
p.s. 후배의 기억과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 때 실었던 시가 위의 시가 아니라 다음의 시였을 수도 있다.
김정환
어둠을 지내는 내 손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밤이슬에 얼굴에
나는 내 손을 부빈다
그래도 내 손금, 내 손톱 속에서
어둠의 행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밤, 어느 잠 못 이루는 골목, 구석길에서
너의 어둠, 나의 어둠에 몸서리치고 있을
그대여 그대여
어둠에 젖는 내 손 내 팔의 마지막 남은 온기로
나는 너를 부른다
힘에 겨워 너를 부른다
언제쯤 환한 새벽이 손바닥처럼 다가오면
너에게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 너의 새벽이 되어
환하게 안길 것인가
아직도 어둠에 몸닳고 있을
그대여 그대여
<월간조선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