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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본문

낙서장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flogsta 2007. 12. 9. 19:22

링크로만 가져와야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 교회의 게시판이 전혀 관리가 되고 있지 않아 보석같은 말씀이 언제 없어질지 몰라 허락을 구하지 않고 가져옵니다.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http://www.net-church.or.kr/zeroboard/zboard.php?id=serm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6


[보이는 것을 버려야 진리가 보인다]

(요한복음강해-084)
 
요7:19-24
2006/06/25 이원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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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인이요, 소설가인 최인호씨는 그의 소설 ‘길 없는 길’이 중앙일보에 연재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 완간되어 시중에 나왔을 때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아주 엉뚱하게 마무리되어 있습니다. 갑자기 심청전의 심봉사가 심청이를 만나 눈을 떠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해석이 없습니다. 독자보고 스스로 의미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소설이 인기가 있자 TV의 한 프로에서 최인호씨를 초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마지막 부분을 왜 심봉사 노래로 마무리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참 재미있습니다. 장님이었던 심봉사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은 공양미 300석이 아니라 딸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심청을 다시 만나고, 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용솟음치는 순간에 심봉사가 눈을 떴다는 겁니다.



심청이는 아버지가 원하는 공양미 300석을 구하기 위해서 인당수 물에 자기 몸을 던지기 전까지 심봉사 곁에서 심봉사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심봉사는 훨씬 이전에 눈을 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양미 300석이라고 하는 환상때문에 심봉사는 심청이의 가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공양미 300석 때문에 중요한 심청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도 잃고, 공양미 300석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사실을 체득한 후에야,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딸을 다시 만난 후에, 그 딸에 대한 사랑이 그의 눈을 띄워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진리, 혹은 가장 가치있는 것은 항상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각자가 한사람 한사람의 공양미 300석의 환상 때문에 그것을 놓쳐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정말 진리에 눈뜨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공양미 300석의 환상, 그것이 무엇이든 먼저 지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귀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9세기에 당나라 선승이었던 인제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가 진정 열린 눈을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유혹을 입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성자와 부모와 친척을 만나면 그들을 죽이라. 그래야 비로소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여기서 죽이라는 말은 살인하라는 말이 아니라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부처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처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부처의 모양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부처에 대해서 갖고 이는 그 모양 때문에 진짜 부처를 잃어버리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그려놓은 부처를 다 버릴 때에 진짜 부처를 만났을 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갖고 있는 부모님의 모양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모양 때문에 부모님과의 더 깊은 만남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을 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너무나 익숙히 알고 있는 것 때문에 진짜를 잃는 적이 한 두 번이겠습니까? 진짜는 바로 내 옆에 있건만, 내가 진짜로 알고 있는 그림과 다르기에 진짜를 놓치고 평생 진짜를 찾아 헤매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니기를 원하는 모양, 집착하기를 원하는 모양은 그 모양이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이 실은 진짜를 발견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공양미 300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눈뜨기를 원해서 딸의 목숨 값으로 지불한 공양미 300석이, 사실은 눈을 뜨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니...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거나 만들지 말 것을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 모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시내선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소식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던 지도자가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인 송아지를 섬기기 만든 게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경외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게 금송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절대로 우상이 아닙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께 드릴 때와 똑같이 드렸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단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앞에 있을 뿐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아론은 금송아지가 완성되었을 때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는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볼 때 뭐 그렇게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정성스럽게 하나님을 표현한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하나님의 칭찬이 이니라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애써서 하나님이라고 만들었던 그 금송아지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철저하게 파괴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부활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그대로 지니시고 우리 가운데 계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몸으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겪으니 예수님께서 이 땅이 지긋지긋해서가 아닙니다. 그 동안 사람들에게 괄시받고 조롱받았던 시간들이 지긋지긋해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를 요16:7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무슨 말입니까? 보이는 하나님인 성자 예수님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인 성령님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하나님인 성자님은 승천하시고, 대신 보이지 않은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양을 볼 수도 없게 하시고, 당신의 모습을 조각지도 못하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유일하게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을 33년 만에 다시 하늘로 올리셨습니까?

왜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고 계십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모양을 새기고 소유하며 지닐 수 있다면 내가 만난 그 모양 때문에 정말 주님을 필시 놓쳐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인하기로 원하고, 내가 만져보기로 원하고, 내가 새기기를 원하고, 그래서 지니기를 원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은 허망한 공양미 300석같이 진리의 장애물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고후3: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신앙은 절대로 보이는 모양을 추구하고 완성하는데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본질을 추구하고,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작업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눈에 보이는 모양이 아니라 보이는 본질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모양을 뛰어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질은 진리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고, 진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보이는 모양에만 집착하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모양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눈에 보이는 모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모양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양만 모든 것이라고 착각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공양미 300석 때문에 더 중요한 심청이를 잃어버리는 심봉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의 형국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일하지 않은 모양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걷는 걸음 거리도 제한하고, 촛불이 켜 있으면 끄지 말라, 꺼 있으면 켜지 말라... 짐은 몇 kg이상은 들지 말고... 안식일 지키고자 하는 저들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쉬는 모양을 고수하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아야하는지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서 짐승을 잡는 제사장들을 대단히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는 안식일 날, 제사장만은 짐승을 잡는 행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매우 귀히 여겼습니다. 그 할례야말로 하나님의 선민되었음의 증거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내 아니가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 부모는 만사를 제쳐놓고 직접 자기 아이의 할례를 손수 행합니다. 만일 아이가 태어난 후 8일째 던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면 그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할례를 안하고 그 다음 날로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례를 당연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아무도 일할 수 없는 안식일에 어찌 할례만을 스스로 직접 행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루,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와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이유에서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할 수 없는 안식일 날 제사장만큼은 짐승을 잡는 것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사장의 그 일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베풀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일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 날,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례야말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형이 중요한 것이 그 모형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의 모양, 제사의 모양, 할례의 모양만을 중시했기에, 그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보다 본질적인 것,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누구보다도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제사장의 모양을 더 아름답게 가꾸었고,

할례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요? 형식과 논리와 모양에는 철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비롯되지 아니한 인간의 모든 형식과 논리와 모양은 철저해지면 철저해질수록, 완벽해지면 완벽해질수록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병자를 낫게 하신 예수님을 비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시는 일을 하는 예수님의 모양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셨습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3-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외모란 단어 ‘옵시스’라는 말은 겉모양이라는 뜻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의’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공의인데,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공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판단할 때에만 겉모양 때문에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 안에서 보여지는 모든 모양의 참 의미와 참 뜻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양을 보려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저 보고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때에만 우리가 정말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모여서 왜 예배를 드립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읽어야 합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내 삶을 송두리째 맡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찬송합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노래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힘입어 사랑을 실천하는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어 달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양을 제아무리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다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망각해버리면 그 십자가는 내 삶을 속박하는 형틀이요 우상이 될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수없이 통독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못하고 그 성경에 드러난 모양만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나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중인격자가 될 것입니다.

내가 밤낮 쉬지 아니하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사랑에 나를 맡겨두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어떤 결과만을 얻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나는 기도하면 할수록 더더욱 이기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전 재산을 팔아 만인에게 구제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판단치 않고 겉모양으로 삶을 판단한다면 내가 베풀어주는 그 구제금이야말로 그 사람을 찌르는 비수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충만하신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양 때문에 이 사랑을 놓치는 자가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허망한 공양미 300석과 이 사랑을 맞바꾸는 심봉사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이 사랑 안에 거하시면서,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이 사랑으로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린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모양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삶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한 군인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전우들이 그 시신을 메고 마침 그 근처인 교회 묘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목사님을 만나서 자기 친구를 그 묘지 안에 매장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목사님이 묻습니다.

“죽은 사람이 세례는 받았습니까?”

“죽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던가요?”

군인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어쩔 수 없던 군인들을 그 전우의 시체를 메고 나가 교회 묘지 울타리 밖에 묻고는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되어 그 친구들이 전우의 무덤에 꽃을 바치기 위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어제 만든 무덤을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찾다 찾다 할 수 없이 교회 묘지 안에 들어가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자기를 찾아온 군인들을 만난 목사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습니다. 군인들이 거길 보니까 분명히 어제 울타리 밖에 만들었던 전우의 무덤이, 울타리 안쪽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영문을 몰라하던 군인들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나 혼자 기도하면서 죽은 사람 영혼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는 묘지의 모양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난 혼자서 무덤을 울타리 안으로 옮길수 없었지만 울타리를 무덤 밖으로 옮길 수는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모든 자와 더불어 하늘나라의 삶이 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이제 끝까지 집착하고 놓기를 거부하던 그 모든 모양을 이 시간 허물어 버리십시오.

그 모양이 무슨 모양이든 허망한 공양미 300석에 불과한, 아니 아무런 쓸데없는 공동묘지 울타리에 불과한 그 모양을 말입니다.



그물감리교회 (032-565-82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