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개로 나누어 이야기할법한 양의 소재들이지만, 전개문맥상 그냥 꽉꽉 채워넣음.
[온라인 진상열전] 정의의 사도들이 나가신다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어떤 사안에 대한 정보가 유통되고 공개 토론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건설적 담론 형성을 방해하는 진상질을 하려면, 나름대로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해당 사안에 대해서 어떤 방향과 수준에서든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하고, 타인을 설득하려는 의지를 발휘해야 하며,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라는 지극히 한정된 자원을 할애해야 한다. 진상질을 직업적으로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예를 들어 실체가 아무리 드러나도 규제책이 나오지 않고 있는 ‘댓글 알바’ 같은), 자신만의 동기부여 없이는 저절로 이루어지기 힘들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열의와 확신을 가지고 진상질을 할 수 있는가. 해답은 사실 간단하다. 열의와 확신을 가지고 담론 발전에 뛰어드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바로 자신들이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정의의 사도”가 되는 것이다.
정의의 사도들은 적극적이며, 신념에 차있다. 자신의 타산적 이득을 위해 움직일 때라면,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활동하고자 노력하며 때에 따라서 절제를 한다. 하지만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열기라면, 그보다 좀 더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뚜렷하게 있고 그것이 딱히 당장의 이익에 상충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여력을 동원하여 정의 추구에 할애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좋은 결과도 많지만 가끔 과도한 신념과 돌진으로 결국 담론을 망치는 진상질로 귀결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정의라는 선의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착각하기 쉽지만, 선의가 선행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선의가 없어도 선행은 이뤄질 수 있고, 선의를 가지고 악행이 이뤄지는 결과 또한 인류역사상 신물이 나도록 많았다. 왜냐하면 선의에는, 몇 가지 별반 합의된 바 없는 매우 모호한 내용들이 흔하게 두루뭉술 생략되기 때문이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누구에게 있어서 ‘선’인가. 혹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이 과연 선이라고 어떻게 검증했는가. 철학적 정의론을 개괄하는 것은 생략하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런 이야기다: 선의란 결과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에너지의 일종일 뿐이며, 결과를 선행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행위의 방식과 각종 주변 맥락의 결합이다. 정의 추구라는 선의를, 선의이기 때문에 관대하게 인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평가해야 하는 이유다.
선의를 과신하다가 행위방식이나 맥락의 문제를 무시할 때, 정의의 사도들은 진상질에 빠진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경우는 각종 사회 사건에서 늘 있어왔는데, 온라인 매체 공간 덕분에 각종 담론 흔적들이 더 뚜렷하게 남아 그들의 움직임 패턴을 좀 더 쉽게 널리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배타적 유형이라기보다는(즉 동시다발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흔히 관찰 가능한 요소들을 몇 가지 구분해보고자 한다.
사적 응징에 대한 동경
온라인 정의의 사도들에게 쉽게 관찰되는 모습 가운데 하나는 사적 응징에 대한 낭만, 그리고 제도적 처벌에 대한 과도한 불신이다. 즉 개별 사건들에 대해서 검찰, 경찰이 제대로 못 잡아내고 법원이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고 여기며, 사적 개개인들이 함께 공분을 터트리고 행동을 부르짖는 것이다.
분명히 사회제도는 사회의 변화과정을 앞서나갈 수 없기 때문에 구멍 투성이고, 그 빈 공간 만큼 사적 응징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간단하게, 효능감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발달된 현대 민주제 사회의 공적 처벌 제도는 매사에 대해 여러 단계를 거치도록 관료화되어 있기에, 문제가 드러난 후 ‘정의 실현’이 이뤄지는 과정이 속시원한 처벌 수위로도, 관심을 유지할만한 속도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반면 사적 응징에 나설 수 있으면, 잘잘못에 대한 ‘판결’은 즉각적으로 이뤄지고 처벌 수위 역시 자신이 당장 할애할 수 있는 해코지 방식들을 잔뜩 동원하면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사적 응징은 가급적이면 쉽게 직접 응징에 뛰어들 수 있는 소재와 방향으로 추구된다. 거대기업의 회계비리를 탐사 추적하는 것은 노력 대비 효과가 쉽지 않고, 특정 개인의 못난 짓을 공개 비난하는 것은 더 효능감이 좋다.
그런데, 사회가 체계화되면 될수록 사적 응징이 금지되고 공권력에 의한 사회적 처벌이 장려된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홉스가 꼽았듯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고 사회의 구심력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중요한 효과는 바로 처벌의 합리성이다. 즉 죄과의 평가와 처벌의 강도를 사회구성원간의 평등성 및 여러 기초 인권에 입각하여 적용하기 위해서 제도화된 공적 잣대가 필요하다. 반면 사적 응징에는 그런 것 없이, 바로 그 상황 속 정의의 사도들의 열기에 따라서 결정된다. 비슷한 죄과라도, 많은 사람들이 많이 흥분했으면 죽일 놈이고 적은 사람들만 그저 그렇게 흥분했으면 대충 넘어가는 것이 바로 사적 응징의 구멍이다.
동원 가능한 역량과 효능감을 기준으로 할 때, 결국 개개인들이 온라인을 매개로 해서 사적 응징에 나서며 선택하게 되는 바 가운데 가장 즉각적인 것이 바로 정보에 의한 응징이다. 그런데 더 많은 정의는 더 많은 개인 신상을 공개해서 뿌리는 것이 되어버리고, 무척 손쉽게 사생활 일반에 대한 침해로 귀결되곤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잘못에 대한 제도적 처벌과 유사 사건 방지보다는 해당 자연인에 대한 폭넓은 괴롭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요소를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심심하면 발생하는 “**녀” 사건들이다(주로 개인 여성을 대상으로 이런 호칭이 널리 붙고 소동이 일어나는 현상의 성불평등 문제는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하자). 누군가의 어떤 몰지각한 행태가 사진이나 동영상 촬영물로 몇몇 온라인 게시판에서 퍼져나가고, 좀 더 큰 여러 게시판 커뮤니티들을 매개로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해당 개인의 온갖 신상정보를 모아내서 공개한다. 이런 ‘신상털기’는 해당인이 온라인에 남겨놓은 모든 흔적들을 대상으로 하고, 종종 엉뚱한 동명이인의 정보까지 같이 섞어 넣으며 부대피해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신상정보들을 바탕으로 해당인의 온라인과 실세계의 활동 공간에서 온갖 모욕으로 정상 생활을 방해한다. 윤리적 이탈에 대한 지적과 사회적 교훈의 수준에서 수용되면 좋았을 사건이라 할지라도, 개인에 대한 집단의 사적 응징으로 가면서 브레이크가 풀려버린다.
아직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소위 ‘루저녀’ 사건을 상기해보자. 사건은 한 자극적 오락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키도 경쟁력이기에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해당 방송분과 화면 이미지가 삽시간에 온라인에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을(특히 남성) 흥분시켰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 발언자의 각종 신상정보들이 대거 수집되었다. 싸이월드에 남긴 사적 기록들을 주축으로 해서, 성형 의심, 실제 키와 영어시험 점수까지도 무작위로 공개 공유되었다. 그리고 정의의 사도들은 해당 여대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홈페이지에 악플 테러를 하는 것은 물론, 모교의 홈페이지 해킹이 이뤄지고 실제 교문에 비난성 낙서까지 도배되었다.
물론 이런 것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가장 비슷한 것으로는 중국의 “인육수색”이 있는데, 포인트 상금사냥꾼이 횡행하는 문답게시판을 모태로 탄생한 문화다. 2008년 즈음에 한 여성이 사천성 대지진에 대해 흥분한 채 욕설발언을 한 유투브 동영상이 돌았던 적이 있는데, ‘인육수색’에 들어가자 불특정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IP추적은 물론이고 메신저 해킹과 계정에 담긴 각종 개인정보가 모두 공유되었다. 여기에는 거주지, 직장주소, 가족사항과 연락처 등이 모두 담겨있었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사적 응징이 이뤄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루저녀’ 사건의 경우, 사적응징의 매력은 실제로 공권력으로는 훨씬 성취가 미진할듯한 정의를 실현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공적 해결은 방송윤리위원회 제소, 언론지면과 토론공간을 통한 여론형성 등이 있지만 속도감도 후련함도 참여의 쾌감도 적다. 하지만 가열찬 사적 응징의 결과 비교적 단시간 내에 당사자 및 방송국 사과를 받아냈고 신체특성 비하라는 후진적 발언 관행에 그만큼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각종 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노출하여 발언에 대한 책임 이상으로 일상생활 전반에 대한 공격까지 확대되었고, 그런 식으로 ‘적정수위’를 지키지 못하는 사적 응징, 특히 집합적 사적 응징의 치명적 문제를 그대로 드러냈다. 나아가 사적 응징은 그 자체로 완결될 뿐이고 그 이상의 것을 공론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식의 발언이 자연스레 소비되는 물질만능주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 부분은 지극히 미미했다. 온라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정보에 의한 사적 응징은 더욱 손쉬워졌고, 그렇기에 이런 문제를 더욱 명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둘 것은, 사적 응징을 하려는 정의의 사도들이 수천 수만명 모인다고 해서 저절로 공공적 정의 구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냥 많은 사람들의 사적 응징일 뿐.
선명한 거악을 물리치기
정의에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악이라는 대립항이다. 정의가 선명하기 위해서는 악 또한 선명할수록 적합하다. 정의를 그 자체로 정의내리는 것은 엄청난 철학적 논제가 되지만, 악을 물리치는 것이라면 무척 명쾌해진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 민주주의라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80년대까지는 운 좋게도(사실은 운 나쁘게도) 독재 정권이라는 확실한 구심점이 되는 퇴치 대상, 뚜렷한 거악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민주주의가 ‘민주화’의 이슈가 아니라 민주제를 통한 사회의 일상적 성숙이라는 과제로 넘어오자, 물리쳐야할 적은 천민자본주의적 욕망들, 과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방향, 일상화된 차별과 불관용 같은 것들이 되었다. 훨씬 모호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어떤 속성들마저 문제의 일부가 되었다.
정의의 사도를 빙자하여 진상질을 일삼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럴 때 명쾌하면서도 어쩐지 잘 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 악을 어떻게든 만들어 버리는 경우다. 상황의 단순화는 물론이고, 문제의 원흉으로 구체적인 사람이나 기관을 상정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근거 있는 팩트보다는 그럴듯한 소문이 훨씬 중요한 재료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대중문화에서 검열 관련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개별 사용자들이 걸러지지 않고 직접 의견을 나누는 온라인 담론 공간들마다 등장하는 것이 바로 YWCA와 여성부에 대한 전설적 비난이다. 이야기의 파편들이 오가며 상기되는 집합적 기억 속에는, YWCA는 과자 조리퐁이 여성 성기 모양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를 시도했고, 게임 테트리스가 성적으로 저속하다는 명목으로 막으려 했다고 한다. 딱히 근거는 없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널리 지속적으로 반복하다보니 일종의 민간전설이 된지 오래다. 이런 구체적 악의 세력이 있으면, 대중문화 검열 이슈는 그들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마치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여러 정권을 거치면서도 무척 일관되게 대다수 정당 의원들과 관료들의 공통된 합의로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 기조가 계속 유지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구체적 악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가장 흥미로운 방식 중 하나는 견고하고 부패한 기득권에 핍박 받는 약자의 도전기라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것이다. 도전하는 약자는 힘겨운 적과 싸우는 진정성과 천재성이 넘치는 비주류가 되고, 공감대를 세우며 응원할만한 대상이 된다. 주인공과 한 편이 아닌 이들은 자연스레 기득권 카르텔에 합쳐 넣으면 되기 때문에 아주 간편하고 융통성 넘친다.
2005-06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줄기세포 사기사건을 기억해보자. 문제의 주인공 황우석은 천재적인 업적을 매일 세우고 있는 과학 영웅인데, 수의학과 소속이기에 서울대 의대를 중심으로 한 재벌의료 카르텔에 핍박받고 있다고 여기는 지지 발언들이 팬카페에 넘쳤다. 어떤 보수-수구 정치성향의 논자들은 심지어 노무현 정권과 재벌의료카르텔은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매력적 약자 시나리오 속에서, 줄기세포 사기는 적들의 핍박이고 음모다.
혹은 심형래 감독의 괴수영화 [디워]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논쟁들을 기억해보자. 이번에는 개그맨 출신의 벤쳐 영화인이자 특수효과 블록버스터에 특화한 꿈을 추구하는 ‘신지식인’ 영웅이고, 그는 충무로의 한국영화계 기득권에 맞선다. 팬들은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게 뻗어가는 이상한 열기에 대한 자성을 요구하는 논자들을 강건하게 비난하고 나섰고, 일부 인터넷 매체들은 곤란한 수준의 문화비평을 양산했다. 이번의 매력적 시나리오에서는 실제 영화의 만듦새가 엉망이라는 간단한 사실이나 크고 작은 열정을 앞세운 노동착취 문제가 고스란히 덮였다.
좀 더 민감하게는 정치인 노무현의 지역주의 극복 퀘스트는 어떨까. 강건하고 시대착오적인 지역주의 기득권 정치세력에 맞서는 약자 개혁정치 영웅으로 정치인생을 바치는 매력적 시나리오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실제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또 존재해야만 하는 ‘지역정치’라는 개념 자체까지도 도매급으로 나쁜 것으로 취급받으며, 정당 정치의 틀이 수년간 다시 불안정해졌으며, 정작 수도권 중심 새 지역주의의 발흥은 고스란히 은폐되었다. 이 부분은 온라인 정치 토론 포럼이라면 어디서나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모든 좋은 시나리오가 그렇듯, 약자 도전기 시나리오 역시 일부의 사실과 나머지 그럴듯한 상상으로 구성된다. 기득권들의 텃세와 견제는 대체로 일정부분 실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과연 정말로 ‘약자’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파를 떠나 전폭적 지원을 받아온 스타과학자 황우석, 공공문화지원금이든 사적 투자든 화제성 속에 쓸어온 심형래, 어쨌든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노무현 등, 약자 영웅과 거악의 간단한 대결구도는 팩트보다는 희망이다. 그 희망은 두 방향으로 작용해서, 주인공은 더욱 약자로 만들고 어떻게든 기득권은 거악이 되어야 한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이 줄기세포 특허를 가로채기 위해 만들어내는 거대한 국제적 비밀 음모처럼 말이다(실제로 지금도 검색하면 그런 류의 주장들이 차고 넘친다).
현실에서는 대체로, 그 거대 기득권은 하나의 거악이 아닌 섬세 복잡하게 얽혀있는 일련의 관계 양상들이다. 거악을 만드는 상상력의 가장 큰 문제는 뚜렷한 거악을 만들기 위해 선명한 진영의 선을 긋고, 거악과 같은 진영으로 포함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적당히 눙치고 넘어가거나 숫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트위터 등지에는 오늘도 다양한 사람들이, 이전 정권부터 이어져온 정책들의 흐름은 과감하게 무시하고는 하필이면 이번 이명박 정권 이후 노동탄압에 다들 신음하게 되었다는 정의로운 열의에 불타오른다.
내 정의의 일반화와 대의 만능
정의의 사도가 진상이 되는 또 다른 지름길은 바로 내 정의를 모두의 정의로 손쉽게 일반화해버리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럴듯한 상위범주를 동원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입시 수학 문제와 달리, 일상적 언어활동에서는 포함관계와 등치관계가 생각보다 흔하게 혼용되곤 한다. 또한 그 결과, 상위범주의 이름을 걸고 정의를 주장하고는 그것이 일반적 정의라고 스스로 믿어버리는 난감한 패턴을 발생시킨다. 개념화시켜보면 어려운 말 같지만, 예를 들자면 “나는 국민이라는 범주의 일원이다”라는 사실이 “내가 곧 국민이다”라는 과장으로 손쉽게 바뀐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를 위한 정의라고 믿기에 주장하는 바”는 곧 “국민의 명령”이고 당연한 정의가 된다. 혹은 정의 대신 ‘상식’이라는 용어를 빌려오기도 한다.
내 정의가 바로 보편적 정의라면 그것에 반대하는, 아니 완벽하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손쉽게 불의로 놓을 수 있다. ‘국민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비국민이고, ‘깨어있는 시민’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으면 무지한 시민으로 낙인찍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런 패턴을 현실정치의 캠페인에 동원하면, 특정 정치인의 유훈을 받드는 특정 정파가 국민의 명령이라는 이름을 표방하여 자신들보다 이념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상대는 물론이고 더 왼쪽에 있는 상대도 만약 한 편으로 합쳐주지 않는다면 모두 정의로운 상식의 회복을 거역하는 자들 취급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 패턴이 왜 문제인지는 약간만 행위자들을 바꿔보면 명확하다. 대통령이 자신이 나름 생각하는 정의를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시민들에게 동의와 희생을 강요한다면 어떨까. 아니 사실 지난 수년간 온라인을 수놓으며 적잖은 비난에 시달려온 청와대 기조연설 보도 자료들이 대체로 그런 내용 아니었던가. 내 정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머리수가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게 동의하는 사람들 다수가 공감한다고 해서(이미 순환논리다) 보편적 정의로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이해관계들 또는 각자의 정의들을 최대한 논리적 합리성을 가지고 조율해보는 것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지속적 고민의 과정은 정의의 열정적 추구에는 아무래도 방해가 된다.
‘내 정의를 일반화하기’의 변형 혹은 진화형은 바로 대의 만능론이다. 대의를 위해 작은 갈등은 무시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인데, 자기 자신의 갈등에 적용하면 관대함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타인의 갈등에 적용하면 확실한 진상이 된다. 대의를 위해 작은 갈등은 넘어가라는 자세는 일견 전략적으로 타당해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쉽게 망가질 수 있는 패턴이다. 사회적 사안에는 종종 하나의 단순한 정의론으로 재단해버릴 수 없는 복합적 이해관계들이 얽혀있고, 갈등은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곤 한다. 그렇기에 하나의 얽힌 사안에서 손쉽게 큰 일과 작은 일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작은 일과 큰 일을 일방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작은 일’들을 뭉개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최악의 경우, 어떤 특정 갈등사안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일부러 작은 일로 분류해버리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작은 일이라고 분류해놓고 뭉개고 지나가려다가 그것이 큰 일로 발전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즉 무언가가 작은 일이라고 주장할게 아니라 작을 때 차질 없이 수습하는 것이 관건이며, 작은 일 큰 일의 분류는 해결한 후 되돌아보면서 비로소 해볼만한 일이다.
이런 패턴의 흥미로운 사례는 유감스럽게도 좋은 취지의 작업으로 시작되었던 한 책을 둘러싼 사건이다. 문제 많은 정리해고와 파업에 대한 강제 탄압 후유증으로 연쇄 자살이 발생해온 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비극을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그간 여러 활동가들이 축적한 사건자료들을 인기소설가가 [의자놀이]소책자로 정리해냈다. 그런데 도입부에서 한 칼럼의 내용을 통짜 삽입하면서, 그 속에 담긴 다른 르포작가의 글을 재인용한 부분을 마치 소설가의 목격담처럼 읽히도록 가필하고는 적절한 인용 명시를 누락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작가 뿐만 아니라 출판사의 적극적 편집 작업도 이 문제에 함께 작용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칼럼 필자가 르포 작가의 저작인격권 무시를 문제 삼으며 조치를 요구했는데, 사과가 이루어져 마무리될 수 있었으나 소설가가 트위터를 통해서 사과를 뒤집고는 ‘내부의 적’ 운운하며 비난을 했다.
쌍용차노조 이슈화에 도움을 주는 선의의 공로는 공로고, 저작인격권에 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죄 취급하며 뭉개는 문제는 문제다. 취재와 집필을 하는 르포작가의 정당한 노동 댓가인 적절한 크레딧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쌍용차의 노동문제와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중요한 노동문제인 것이다. 관심이라는 차원에서 한쪽으로만 이슈를 몰아가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경우는 생길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상쇄되지 않는 각각의 무게를 지닌 두 가지 사안이다.
그런데 소설가 본인은 물론이고, 그간 노동 사안에 있어서 진보적 스탠스를 보여온 몇 논객들이 대의 만능론을 꺼내드는 모습을 보였다. 문화비평가로 이름이 알려진 이택광의 경우 자신의 트위터에서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문제도 일단 트위터에 올라오면 해프닝이 되어버린다는…” 이라고 발언하며, 해당 소설가에게도 “좋은 일 하셨으니, 작은 일은 잘 처리해서 넘기시길. 언제나 진심은 누군가 알아주는 법입니다” 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여기에는 내부의 적을 운운한 진영논리로 르포작가의 노동에 대해 경시한 모욕적 처사에 대한 문제인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별개의 중요 사안으로 보지 않고 ‘작은 일’이라 부르며 쌍용차 노조 알리기라는 대의 앞에서는 사소한 해프닝으로 취급할 따름이다. 그는 이후 트윗 발언 및 다른 지면의 기고를 통해서 소설가 책임론 때문에 쌍용이 묻히는 것이 문제라며 논지를 나름대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서로 다른 층위의 두 문제 중 하나를 사소한 해프닝으로 묻어버리고 시작한 부실한 기반을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가에 대한 ‘실드’를 치지 않는다고 나중에 주장할지라도 결국 쌍용 이야기를 위해 다른 것은 묻어버려도 좋다는 맥락으로 독해되는 함정에 빠졌다.
더욱 노골적인 사례는 본업인 미학자보다 시사평론가로 더 알려진 진중권에게 나타났다. 그는 이 사안에 대해 트윗으로 “노동자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더 널리 퍼져야 하거늘, 그 목소리가 따옴표로 묶인 채 그 누군가의 ‘지적 재산권’으로 둔갑해 배포를 거부당하는 이 사태의 황당함보다는…. 공작가의 싸가지에 대한 분노가 더 큰 게죠”라고 남긴 바 있다. 저작인격권이 아닌 지적재산권이라는 엉뚱한 방식을 호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택광의 경우보다 한층 강력하게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은 무시하라는 주장을 한 셈이다. 여기에도 역시 유명소설가가 이뤄낼 전파라는 성과를 명목으로, 현장에서 해당 이야기를 건져올렸던 르포작가의 노동권은 깨끗하게 무시당하고 있다.
더욱 얄궂은 것은 이런 식의 대의 만능론은 정작 늘상 노동권 일반을 탄압하기 위해 동원되던 것이라는 점이다. 선진국 진입이라는 대의를 위해 노동자는 정당한 분배 몫을 유보하고 노동권을 제한받아야 한다는 논리 말이다. 내 정의의 과잉일반화, 그 중 한 형태인 대의 만능론은 이렇게 눈 먼 정의 추구의 진상질을 배출한다.
예방책: 정의 추구에 함몰되지 않는 인지훈련
서두에 언급했듯, 이런 패턴은 얼마든지 함께 출몰하며 진상의 총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마음에 안 드는 발언을 날린 특정 개인에 대해 집단적으로 몰려가서 사적 응징을 가하되, 그를 거악의 일부로 취급하며 그런 행동이 민족의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든지 말이다. 하다못해 인기가수 타블로의 스탠포드대학 졸업이 사실이 아니라며 음모론을 강력하게 주장한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타진요)’ 카페의 활동 역시 그의 캐나다 국적을 거론하며 민족감정이라는 대의와 연결하고자 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다.
정의의 사도로 출발해서 진상이 되어버리는 비극을 말리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든 자기 자신의 경우든, 그다지 쉽지 않다. 정의 추구의 쾌감은 그만큼 매력적이고, 온라인상에서 손쉬운 효능감을 얻으며 비슷한 생각의 동료들까지 집단화하면 빼내올 방법이 마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볼만한 것은, 불의라고 여기는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인지훈련을 쌓아두는 것이다. 즉 정의에 대한 동경이라는 열의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니 잘 활용하되, 방향을 틀어볼 수 밖에 없다.
첫째,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단죄보다는 그런 사례들을 막아낼 제도를 고민하는 쪽으로 생각을 가다듬는 것이다. 즉 함께 때려 잡는 것을 넘어, 함께 룰의 구축을 토론하는 것 말이다.
둘째, 세상사는 무엇이든 다양한 문제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을 훈련해야 한다. 한 사건 안에 여러 논점들이 발생하고 있을 때, 서로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분리하고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말이다.
셋째, 지속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포지티브 운동을 먼저 생각하라. 특정인을 ‘지하철 개똥녀’라고 낙인 찍고 신상을 터는 것보다, 지하철 무례행위 불명예의 전당 게시판이라도 만들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것이 어떤가.
이런 식의 사고를 훈련하며 사안에 접근한다면 정의 추구로서는 덜 신나겠지만, 건설적인 담론 구축에는 아마도 약간 더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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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지 자음과모음R 연재. 합리적 담론 형성을 가로막는 찌질한 진상질 패턴을 계열화, 반면교사 삼는 일종의 서바이벌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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