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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읽다 본문
유명한 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두께(750쪽)의 압박 때문에 손 대지 못하고 있던 [총, 균, 쇠]를 읽었다. 걱정과는 달리, 논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쉽게 읽히는 편이다.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현대 문명이 서구유럽중심으로 발달하게 된 이유는 인종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 차이때문이다" 정도의 문장이 되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유태인이 우수한 인종(민족)이며, 한민족도 그에 뒤지지 않게 우수한 민족이라는 주장을 늘 미심쩍게 생각했다. 대개 그런 주장들은 "환단고기"류의 황당한 소설로 이어지기 쉬우며, 상황이 잘 맞아준다면 일본 군국주의처럼 다른 민족을 압살하는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현실적으로 유대인이 건국한 이스라엘이 세계에서 큰 위세를 떨치고 있고, 우리나라도 식민지시대와 전쟁을 겪고 난 뒤의 잿더미에서 경제기적을 이룬 "역사적 사실"이 있기에, "상식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그런 주장을 수긍하는 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종류의 믿음이 기대는 역사적 "사실"이 일어난 원인이 인종의 차이가 아니며,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하게 제공되었던 환경적인 요소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유대인과 한국인을 거론하고는 있지 않지만,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오류라는 맥락에서 마찬가지의 주장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온 많은 내용 중 기억할만한 일부만 소개할까 한다.
1. 가축화에 적합한 동물(육식성이 아닐것, 빠른 성장속도, 번식의 쉬움, 온순한 성격,사회성을 모두 갖춘 동물)들 중 홍적세 말기에 밀어닥친 멸종의 파도속에서 살아남은 동물이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72종이 살아남은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51종, 남북아메리카에서는 24종,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나마 후보종 중에서 실제로 가축이 된 종은 유라시아가 13종,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가 0, 남북아메리카에서는 1종만이었다.
2. 위의 이유로, 가축과 오랜 기간동안 함께 살면서 가축이 옮기는 수많은 병균에 노출되고 항체를 형성했던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도달하였을때, 수많은 신대륙인들이 유럽인들의 총보다 유럽인들이 몸에 붙이고 왔던 병균에 의해 죽고 말았다.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2,000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이후 한두 세기에 걸쳐 최대 95%가 감소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을때는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인디언들의 수가 100만명 정도 밖에 없는 "빈 땅"이었기에 유럽인들이 "일부를" 차지하고 살더라도 문제가 없었다는 면죄부를 준다.
3. 식량생산방법 및 기술의 전파속도에 차이가 있었다. 이 책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은 동서로 길고,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 대륙은 남북으로 길기때문에, 어느 한 지역에서 발생한 식량생산의 지식이 다른 곳으로 전파되기가 유라시아대륙이 더 유리했으며, 그 결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많이 생겼으며, 그 문명들 사이의 경쟁이 또 다른 기술혁신을 가져와 또 전파되는 식으로 상호 영향을 미치며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북이 긴 아프리카나 남북아메리카의 경우는 위도의 차이로 인해 (기온이 다르므로) 어느 지역의 새로 개발된 농작물이나 농업기술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기가 어려워 졌다고 한다. 따라서 농업생산및 기술의 발전속도가 차이가 났다고 한다.
4.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이 1998년으로 10년이 넘었기에,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었다. (반론링크)
하지만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전적으로 뒤 엎을만한 반박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가인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1937년 생으로, 이 책을 썼을 때가 61세! 참고로, 원래 이 사람은 조류학자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의학,생태학,언어학,역사학,생물학등 작가의 폭넓은 관심분야가 드러나고, 또 그 이해의 정도도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생에 걸쳐 연구를 거듭하여 이런 작품을 내 놓을 수 있다니 생활에 찌드는 인생으로서는 부럽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