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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자료공유5 - 악의에 찬 소문의 희생자 Margarete Maultasch, the last Countess of Tyrol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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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자료공유5 - 악의에 찬 소문의 희생자 Margarete Maultasch, the last Countess of Tyrol

flogsta 2010. 11. 10. 08:30

In 1334, the castle of Hochosterwitz in Austria was besieged by the Duchess of Tyrol. The Duchess knew that the siege would take some months because the fortress was located on a cliff high above the valley floor. As time wore on, the defenders became desperate: their only remaining food was an ox. The Duchess's situation was also severe: her troops had become unruly, and she had urgent matters elsewhere. Then, the castle's commander had an idea that must have seemed utter folly to his men. He had the last ox slaughtered and thrown over the wall in front of the enemy camp. The Duchess interpreted this scornful message to mean that the defenders had so much food that they could waste it. At this, the discouraged Duchess quit her siege. The commander's ______ tactic made the Duchess believe that her siege wasn't working. (2010 EBS 10주완성, p.26) 

빈칸에 들어갈 적절한 말을 고르는 문항으로, 답은 psychological 입니다. 아군에게는 식량이 많이 남아있다고 과시함으로써 적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가도록 심리적인 전략을 구사했다는 했다는 일화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the Duchess of Tyrol 마르가레테 마울타쉬 티롤 백작 (Margarete Maultasch, the last Countess of Tyrol (1318 – October 3, 1369) 말합니다.

아버지가 Tyrol 백작이었는데 아들이 없이 죽고 여자로서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았기에 여자 백작(Countess) 되었고, 후에 공작과 결혼했기에 공작부인(Duchess) 되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말에서는 왕비와 여왕이 별개의 단어로 존재하지만 영어에서는 queen으로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countess duchess 백작부인, 공작부인일 수도 있고 여자 백작, 여자 공작일 수도 있기에 번역할 주의가 필요합니다.

Margarete Maultasch 제법 유명한 사람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내용을 위주로 Margarete Maultasch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Margarete Maultasch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Tyrol Carinthia지방의 백작이었습니다. 지방의 위치는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두 번의 결혼에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딸 Margarete이 자신의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도록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루이4세의 동의를 얻어 내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딸의 입지를 좀 더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룩셈부르크 가문의 John Henry와 결혼시킵니다. 이 John은 보헤미아 왕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되는 룩셈부르크의 Charles 4세의 동생입니다. 당시로는 유력한 가문이었지요. 그런데, 이때 Margarete의 나이는 12세, 남편인 John Henry는 무려 8세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았지만, 막상 아버지가 죽고나자 신성로마제국황제 루이4세는 그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아버지의 영지인 Tyrol 지방과 Carinthia지방을 엉뚱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려 합니다. 이에 Margarete는 자신의 시댁인 룩셈부르크 가문의 힘을 동원하여 Tyrol지방을 물려받는데는 성공하게 되며, Countess of Tyrol (Tyrol 여자 백작)이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신이 잃어버릴 뻔한 아버지의 유산을 되찾도록 도와준 남편 가문의 도움은 정말로 고마운 것이었으나, 남편인 John Henry는 너무나 미성숙하고 오만하였기에 (당시 19세였으며, 또 왕자였으니까요^^) , 아내인 Margarete뿐만 아니라 Tyrol지방의 귀족들과도 사이가 나빠지게 됩니다. 시댁인 룩셈부르크가문에서 화해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Margarete는 귀족들의 힘을 빌려 남편인 John Henry를 자기 땅에서 몰아냅니다.

이제 룩셈부르크 가문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 뻔한 일이었기에, 위협을 느낀 Margarete는 결혼을 통해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구하게 됩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23세였으니 한참 혈기가 넘치던 시기이기도 했겠지요) 그녀와 결혼하게 된 사람은 바로 루이5세입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름이지요? 예! 바로 아버지와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자신이 받아야할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 신성로마제국황제 루이4세의 아들입니다!

이런 걸 보면 정치에는 피도 눈물도 배알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6세는 새로 결혼한 Margarete와 루이5세 부부를 파문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Margarete이 남편인 John Henry와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에 대해 교황의 허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신(교황, 사제)의 허락없이는 결혼을 할 수가 없고, 게다가 카톨릭의 교리상으로는 이혼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제멋대로 이혼과 결혼을 한 이 사건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는 영화 "천일의 앤"으로 잘 알려진 상황이기에 별 감흥이 없을 수 있지만, "천일의 앤"의 당사자인 영국의 헨리8세가 교황의 명을 어기고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과 결혼한 것은 16세기의 일입니다. Margarete의 사건보다 200년이나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요. 그래서 Margarete과 루이5세의 결혼을 중세시대 최초의 "civil marriage"(신고결혼, 종교의식에 의하지 않은 결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후 여차저차해서 Margarete과 루이5세에 대한 파문은 거두어지게 됩니다만, 이 사건으로 인해 – 그리고 정적들의 음모로 -- Margarete에 대한 악소문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어, 그녀에게는 Mouthbag (추녀)라는 별명이 붙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한번 퍼진 인식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대대로 전해져서, 후손들도 거기에 동참하게 됩니다.

Quentin Matsys가 그린 "추한 공작부인(The Ugly Duchess, 1525-30)"은 Margarete의 모습을 의도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John Tenniel은  루이스캐럴의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를 그릴 때 등장인물중 Duchess의 모습을 Quentin Matsys의 그림을 보고 그립니다. 

추한 공작부인 (The Ugly Duchess, by Quinten Massijs,1525-30)
공작 부인과 그 가족 (The Duchess with her family, by John Tenniel, 1865)


아래는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는 Margarete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중세시대의 그림임을 감안하면, 실제 그녀의 모습이 전 유럽에서 악명(!)을 떨칠만큼 추했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녀는 한 여자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지키고 사랑할만한 남편을 얻기위해 노력했을뿐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몇백년동안 사람들의 머리속에 추한 괴물로 남겨지도록 만들어 놓다니, 정치란 역시 무서운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지문에 나오는 Hochosterwitz 성은 오스트리아의 Carinthia지방에 있는 성입니다. Carinthia지방은 원래 Margarete의 아버지의 영지였지만 신성로마황제 루이4세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지요. 그 영지를 회복하기위해 Margarete가 군사를 일으켰을때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소를 잡아 성벽아래로 던져버리는 것을 보고 사기가 꺾여 철수했다는 이야기는 위키피디아에는 legend라고 쓰여 있어서 정사(official history)라기 보다는 야사(unofficial history)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Hochosterwitz 성 입니다.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식량만 충분하다면 쉽게 함락당할 것 같지 않아보입니다.

저는 위 지문에 나온 일화를 읽었을 때, 옛날 영화인 "마사다"에 나오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마사다"는 로마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이 마사다요새에서 최후에 농성을 벌이다가 전원자결했던 역사적 사실을 영화로 만든것인데요. 이중에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가 마사다요새입니다. 헤롯왕이 유사시 자신이 피난 가기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삼천명이 몇 년간 지낼 수 있도록 식량창고 및 완벽한 시설을 갖추었다고 하네요. 여기에 틀어박힌 유대인을 공격하려는 로마인들은 주위가 뜨거운 사막이라 물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요새안에 풍부한 물이 보관되어있었기에 견디기 쉬웠습니다.

영화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인들의 사기를 꺾으려는 목적으로, 로마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요새위에서 물을 요새밖으로 쏟아버립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Countess of Tyrol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